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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가격표

『생명 가격표』는 사회가 각자에게 매기는 가치, 일종의 가격표와 그 가격표가 불러오는, 혹은 가격표에 반영된 사회적 차별과 불공정성에 대해 다룹니다. 공정한 사회, 법 앞의 평등한 사회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실재하는 차별을 조명합니다.

9.11 테러 유족 보상금

전대미문의 재앙이었던 9.11 테러 이후 미 당국은 유족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피해자들의 소득, 부양 가족, 거주 지역, 보험금 등등.. 온갖 배경 요소를 변수로 삼는 복잡한 계산식을 사용한 결과, 정부가 지급한 보상금은 수십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까지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생명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말과 달리 기업의 CEO와 대학생, 저소득 노동자의 생명의 무게는 모두 다르게 평가된 것입니다. 저소득자 앞에 주어진 보상금은 고소득자와 수십배 차이가 나고, 고소득자 앞에 주어진 보상금은 향후 예상 소득을 상당히 밑돌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양 극단으로부터 이 보상금이 불공정하다는 불만이 대두됩니다. 이후 이 보상금 기준을 마련한 경제학자는 동일한 보상금을 지급했어야했다고 회고합니다.

법 앞의 평등

모든 법원은 '법 앞의 평등'을 표방하지만 미 법원은 이에 실패합니다. 부유한 자가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조명할 점이 더 있습니다.

형사 사건에서 백인 여성이 피해자이거나 흑인 남성이 가해자이면 형량이 더 높아집니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상대로 가해한 사건이면 형량이 더욱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건은 피고인의 형량이 더 높아집니다. 이는 물론이고 민사사건에서도 피고가 지불할 배상금이 더 높아지거나 합의금이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아집니다.

공공기관이 다는 생명 가격표

공공기관, 특히 규제기관은 자신들의 정책이 가져올 변화를 평가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 비용편익분석을 수행합니다. 어떤 정책이 얼마나 비용이 소모되고 얼마나 이익을 가져오는지 확인해야만 사회적인 낭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용편익분석은 경제학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는 다소 부적절합니다. 미래의 편익을 현재의 편익으로 환산하는데 사용되는 할인율은 미래에 얻을 가치를 낮게 평가하므로 정책은 미래 세대보다 현재 세대에 집중됩니다. 이것은 현재의 당면한 이득만 선택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가 설정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민주사회는 다시금 말하자면 로비 활동의 사회입니다. 서로 상충되는 두 이해관계자가 존재하는 정책의 경우, 이 비용편익분석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비용편익분석이 나름의 근거를 두고 수행되긴 하나, 이 분석에 투입되는 변수들에 대한 가중치는 이해관계자들의 로비 활동에 의해 수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중치의 변화는 정책의 방향을 정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중치의 변화가 의사 결정을 뒤집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민감도라는 것이 정의되었습니다. 민감도가 높으면 가중치가 조금만 수정되어도 정책의 방향이 쉽게 바뀝니다. 저자는 로비 활동에 정책 기조가 쉽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 민감도를 확인하는 민감도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쉽게도 정책 입안자들은 민감도 평가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업의 의사 결정에 활용되는 생명 가격

기업은 많은 의사 결정을 돈으로 내립니다. 단순히 사업 운영, 프로젝트 전략, 임금 정책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기업은 모든 것으로부터 유/무형의 수익을 얻고자 하고, 생명도 이 대상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생명을 너무 금전적으로 바라봐서, 기업의 의사 결정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기업은 자신들이 판매하는 제품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리콜을 하든, 손해 배상을 하든, 어떠한 형태로 기업은 항상 가격이 낮은 방안을 선택합니다. 모든 고객들의 생명에 높은 가격표가 붙을 것이라 예상된다면 손해 배상 소송을 피할 수 있도록 리콜을 진행할 것입니다. 반대로 생명의 가치가 낮게 판단되면 리콜이나 사후 처리에 투입될 비용이 더 비쌀 것이므로 하자를 숨길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많은 사례에서 기업들은 낮은 생명 가격표를 채택하여 자신들의 제품의 결함을 숨기는 것을 택했고, 자신들이 평가한 생명의 가치보다 더 많은 비용을 나중에 추가로 피해자들에게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에 매기는 가격표

생명 가격표는 생명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질병 말기, 식물 인간 등 의료 서비스에 생명을 의존하는 터미널 케어의 영역에서도,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임신과 출산의 영역에서도 생명 가격표는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억지로 유지하는데 투입되는 병원비가 생명의 가치보다 높게 평가된다면, 혹은 의료 인력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다른 생명에 투입하는 편이 편익이 높다고 평가된다면 하나의 생명을 사그라들게 둘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특히 이전 세대 사회에선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일종의 투자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식 농사"라는 말이 바로 이를 암시합니다. 사회의 발전 단계에 따라 이 투자의 계산식이 변화하게 됩니다. 농경 사회에선 자식이 농사에 투입할 수 있는 시기, 근대에서는 자식을 공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시기에 따라 투자의 평가 가치가 달라져왔습니다. 물론 자식의 출산에는 비금전적인 가치도 평가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유대 관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장난 계산기

인간의 뇌는 객관화된 처리 장치가 아니므로 생명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요소가 같은 유형의 상황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일례로 2010년 칠레 광산에 매몰된 33명의 광부를 구하기 위해 2천만달러가 투입되고 전 세계 언론이 사건을 집중 조명하는 동안 다른 지역에선 수백에서 수천명의 광부들이 작업 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그 다른 지역의 광부들을 구조하기 위해 투입된 비용 역시 턱없이 적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칠레 광부들의 사례가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전달되면서 발생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칠레 건은 구체화되었고 다른 건은 구체화되지 못했습니다. 발생 사실을 모르는 사건은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발생 사실을 목도한 사건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개개인의 경험이 되었습니다.

불공정을 완화하기

"세상은 모두 평등하다"는 외침 아래 이루어진 모든 과학/경제적 가치 평가는 생명을 불평등하게 판단합니다. 혹자는 생명은 가치를 매길 수 없다고 주장할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계속 우리에게 가격을 부여하고 가격대로 대합니다.

추상적인 것을 정량화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매우 주관적이거나 편향적입니다. 여기서 초래되는 불공정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 "과학적 방법"이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므로 영국의 NICE나 태국의 HITAP처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NICE는 의료적 효과와 비용 효과성을 모두 고려하여 의료 서비스를 권고하고, HITAP은 비용 가치 외에도 사회, 윤리, 제도적, 정치적 문제도 분석합니다.

생명 가격표는 대개 불공정하므로, 반드시 가격표가 공정히 부여되도록, 그래서 생명과 인권이 언제나 보호되도록 신경써야 합니다.